S군의 화폐박물관





상평통보 당오전이다.

당오전은 1883년부터 1894년까지 사용된 조선 후기의 화폐이다.

당오전은 상평통보 당일전의 5배 가치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다. 흥선대원군과 민씨일가의 싸움은 흥선대원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 했다. 하지만 민씨일가가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된 김윤식이 청나라 군대 3,5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임오군란의 여파로 인해 결국 일본의 압박과 협박 속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게 된다.

  이 시기 정부에서 고용한 최초의 외국인 묄렌도르프는 조정의 재정 고문을 맡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50만냥의 손해 배상을 감수해야 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민씨일가에게 당일전보다 5배의 가치의 당오전 발행을 건의하게 된다. 김옥균이 민영익의 집에서 묄렌도르프와 거의 하루 동안을 당오전 발행에 대한 논쟁을 벌여 담판을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오전 또한 여러 군영, 관청, 지방감영에서 주조되었다.

사진 속 당오전온 '호조(戶曹)'에서 주조되었다.

호조는 '조선 시대에, 육조 가운데 호구, 공부, 전량(田糧), 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이다.


당오전 중에서도 경기감영(京) 등에서 주조한 당오전의 경우,

재질이 좋지 않고 엽전 속 한자가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호조에서 주조한 당오전의 경우, 한자가 또렷하고 보기 좋다.

사진 속 당오전은 호조에서 주조한 대자 종류이고, 소자 종류도 있다.

또한 일(一) 자 아래에 있는 월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종류가 나눠지기도 한다.


 당오전은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주조되었다. 하지만 화폐 주조에 대한 차익만을 노린 발행 의도 등으로 화폐 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급등하여 화폐 제도의 문란은 물론 급기야 사회 경제적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당오전의 주조는 외척인 민씨일가의 배만 채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평안감사인 민병석은 사설 주전소를 만들어 상평통보를 주조해 갑부가 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경장이 발생해 민씨일가가 몰락하자 당오전 주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 우리나라 고전 화폐의 경우, 대부분 한영달 선생님의 '한국의 고전'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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