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돈이라 할지라도 아름답지 아니한가
작성: 유 주 이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연구원)
살아온 삶
1922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난 정성채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냈다. 유난히도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마산지역에서 일본 학생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야만 했고,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 중 조선교육령에 의한 교육과정을 소화해야 했다. 우리의 역사가 아닌 오로지 일본의 역사만을 강압적으로 배웠으며, 우리말을 쓸 수도 읽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자신의 꿈을 키우기 위한 발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중략)
그녀는 성형외과 전문의였는데 당시 국내에는 성형외과가 특수 전문 진료 과목으로서 인식이 부족했고 전문의 자격을 보유한 의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66년에서야 비로소 박사를 포함 30여명의 전문의가 모여 대한성형외과학회를 조직해 국내에 창립하게 되었다. 그녀는 솜씨가 좋았는지 50년간 일하면서 밀려드는 손님들로 개인시간을 가질 수 없을 정도였다. 72세에 현역에서 은퇴했는데, 그 때까지 수술대에서 단 한번의 손떨림도 없을 정도로 타고난 의사였다.
의사에서 수집가로
1963년부터 국제성형외과학회(IPRS), 국제미용성형외과학회(ISAPS), 대한성형외과학회, 대한미용성형외과학회 등 다수의 학회에서 정회원으로 활동하며 수차례 논문을 발표하다보니 학회 발표차 해외출장도 잦았다.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 3회 국제성형외과 세미나 및 교육프로그램에 참석한 후 돌아오는 길에 방문한 영국 런던에서의 여정이그녀에게는 뜻하지 않은 화폐 수집의 계기가 되었다.
여행 기간 중 런던의 한 미장원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두상이 있는 1실링을 받았다. 그 후 수집하게 된 1실링 동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발행연도가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에도 동일한 크기와 재질로 제작·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고 신기했다. 국제학회에 참여 하기위해 방문했던 나라들의 돈을 보면 그림과 문양이 제마다 의미가 있었고 특징이 있다는 것에 큰 흥미를 느껴 기회가 될 때마다 세계 각국의 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화폐는 각 나라마다 재질, 크기, 그림이 다르고 또한 그 나라의 역사, 문화, 예술, 공예 등 모든 분야를 포함하고 있고 화폐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것들도 있다. 그녀는 평소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항상 많은 관심을 보여왔는데 수집한 세계 화폐 중 바티칸시 주화, 이탈리아 화폐 등이 재미있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뉴질랜드에서의 학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히티, 피지, 통가 등 남태평양의 여러 섬나라들을 순회할 기회가 있었다. 화폐 수집가로서 어느 나라에 가서도 항상 먼저 은행에 들러 그 나라의 기념주화를 먼저 찾았던 그녀에게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동전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 남태평양의 통가 화폐, 뉴질랜드의 화폐가 나라마다 그림에 특징이 있으면서 가장 흥미롭고 인상이 깊게 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외 화폐를 차츰 모으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점차 한국 화폐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보게 된 동전(銅錢)
처음에는 구하기 쉬운 종류의 한국 화폐부터 수집을 하기 시작했는데 한국 화폐에 관심을 갖고 모으기 시작하자 좀 더 체계적으로 수집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국 화폐사에 관한 지식을 서적을 통해 축척하고 전문 화폐수집상에게 의뢰도 했다. 지금도 전문 화폐수집가들에게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는 김화사(金貨社)의 김인식씨가 집필한 한국화폐가격도록(韓國貨幣價格圖錄)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의 한국 화폐수집에 대한 애착과 의지는 고려시대부터 현행 한국은행권까지 시대별, 종류별로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모든 화폐가 거의 빠짐없이 수집되었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화폐 수집을 넘어 조선시대 별전까지 수집대상으로의 영역을 넓혔다는 것만으로도 정성채 박사의 주화에 대한 관심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박사가 애장하는 주화는 전 세계에서 한 두 개 밖에 없다는 희귀품인 을유년(1885년) 발행 주석시주화와 국제규격으로 1892년 발행되어 눈에 띈다는 오량은화, 1906년 발행 십환금화 등의 근대주화가 있고 1970년 해외에서 한국 홍보용으로 발행되어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 금·은화 세트가 있다. 박사는 이 기념주화세트에 새겨진 문양들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돈이 역사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을 말하고, 문화를 말하고, 여러 가지 의례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화폐는 아니지만 일본에 있는 한 지인으로부터 기증받았다는 조선시대 마패도 있다.
1970년대 강남 말죽거리에 토지 투자 붐이 일어났었던 당시 병원 동료 의사가 말죽거리 땅을 사두라고 했던 것을 마다하고 화폐수집에 20여 년간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화를 박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근데 그 때가 마침 말죽거리에 땅을 팔던 때입니다. 그래서 남자의사들이 하는 소리가 아유, 정박사. 말죽거리에 땅 사러 보러가자. 근데 그 외과 선생님 한 분하고 저 하고였습니다. 환자가 너무 많으니까 이거 보러 갈 여가가 없는 거예요. 외과이고. 그래서 이 사람은 급부자가 됐습니다만. 이 대신에, 돈 대신에, 말죽거리 땅 대신에, 제가 취미 겸 투자해서 근 20년 동안인가 모았지.”
문화유산의 보존
수집된 한국 화폐가 체계적으로 분류, 소장되자 재산의 거의 1/3에 이르게 됐다. 70세 되던 해인 1992년 그녀는 그간 개인의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 수집해온 귀중한 화폐 2,876점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기증을 하게 된 동기는 많은 고민과 다른 나라 수집품들의 사례를 고려한 결과였다.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의 소장품들이 원래는 개인소장이었던 것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이야기와 일본 메이지 시대의 그림들을 후대 일본인들이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탈리아에 우피치박물관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미술관입니다. 거기에 메디치 집안에...근데 메디치가문이 자꾸 내려가서 나중에 아들 하나가 맡았는데 자식이 없는 거야 자손이. 근데 아들의 부인이, 이 아들이 대가 끊어졌으니까 그 그림 모든 것을, 집까지 해서, 집을 시청인가로 쓰고 있었는데, 집까지 같이, 모든 그림을 시에다가 기증을 한다. 그렇게 했는데 단 시외로 가면 안 된다. 하고 그것을 기증하게 됐어요. 그 후에 그 가족이 더 기증을 해서 현재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보게 된 이유가 그 여자의 아이디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일본 메이지 시대의 그림이 12폭인가 있는데 너무 비싸서 그 12폭 다 산 사람이 없어. 이것을 각 유명한 부호들만이 그 것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때 돈으로 큰 돈. 그래서 이 그림이 현재 어디로 갔느냐 보게 된 거야. 그랬더니 한사람도 자기 선조의 그림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다 큰 돈이니까 필요할 적에 팔아먹은 겁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기증에 대해서 딸한테 의논도 안했습니다...내 친구가 하나 최박사라고, 그 친구하고 의논했더니, 좋다. 그 친구가 소개해가지고 그럼 여기에 드려야 되겠다. 해서는 70세에 결정을 했는데, 그 것은 나중에 우리 딸도 어머니 잘했다. 그렇게 얘기를 해줬습니다. 또 그것이, 그렇게 모은 것이 제 재산에 그야말로, 솔직히 얘기해서, 3분의 1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영원히 남을 수 있으면, 또 박물관에 대해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화폐 외에도 한국 도자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성채 박사는 2011년 현재 여전히 여행과 독서를 즐기고 취미삼아 정원에 텃밭을 가꾸며 은퇴 후 여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 화폐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해주신 정성채 박사님 감사합니다.^^
위 글과 사진은 모두 국립민속박물관의 자료입니다.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