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군의 화폐박물관



고려시대 엽전 중에 하나인 '삼한중보(三韩重宝)'이다.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엽전들이 발행되었다.

문무전을 비롯하여 건원중보 배 동국전,

동국중보, 동국통보, 해동중보, 해동통보, 해동원보, 삼한중보, 삼한통보 등

다양한 종류의 엽전을 발행했다.


역사책에는 1102년에 해동통보를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외의 엽전들의 정확한 발행년도는 알 수가 없다.

기록을 근간으로 고려 숙종 때, 엽전이 활발하게 주조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삼한중보(三韩重宝)라는 이름에서 나는 '삼한(三韩)'이란 단어에 주목해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한은 

삼국 시대 이전에 남쪽에 존재했던 국가인 '마한, 진한, 변한'을 일컫는다.


하지만 고려시대에서 삼한은 위의 뜻과는 조금 다르게 쓰인 듯 싶다.

아마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삼한이라는 용어는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마한, 진한, 변한이 각기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었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일컬어 일통삼한(一通三韓)이라 부르거나 삼국 전체를 통칭할 때 삼한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인식은 후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고려는 후삼국의 통일을 일컬어 일통삼한이라 칭하였으며, 이후에도 한(韓)은 고려나 조선을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었다. 대한제국의 한(韓)이라는 국호는 삼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때의 삼한은 삼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대한제국의 뒤를 이어 한(韓)을 국호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고려 숙종은 동전의 보급을 위해서 관리들에게 유통을 권장하였으며 

개경에 주점과 점포를 설치하는 등 유통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동전의 주조⋅유통을 시도하기 시작한 숙종연간에 

“국인(國人)이 처음으로 용전(用錢)의 이로움을 알게 되었다.” 고 하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각종 동전 역시 국내에 유입된 중국화폐 및 철전 등이 그랬던 것처럼 

통용범위가 실용가치가 전제된 쌀⋅베 등 현물화폐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각종 동전, 즉 명목화폐를 법화로 주조하여 그것을 상거래의 교환수단

으로 삼으면서, 관료⋅군인의 녹봉으로 지급하는 방법 등을 통해 화폐의 유통을 추진하였다.

또한 숙종 6년(1101)에는 귀금속화폐로서 일종의 칭량화폐인 은병(銀甁)을 주조⋅유통시켰다.


그렇다면 숙종이 주전도감을 설치하면서까지 주조한 화폐가 널리 통용되지 못했을까?


우선 고려 상류층의 귀족들이 자국의 화폐 주조를 반대했다는 기록이다.

귀족들은 독자적인 경제체계를 만들고자 했고,

왕은 화폐를 통한 경제안정을 만들고자 한다.

당시 귀족들은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는데,

숙종은 귀족들의 사적인 경제활동 영역을 국가 영역으로 끌어들여

재정확보와 귀족들의 가혹한 수탈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서 사용하던 엽전들이 고려로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귀족들은 자연스레 송나라의 엽전들을 재산축척의 

당시 대외교역 대금 등으로 고려 등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동전의 양이 

송나라에서 전황(錢荒)이 일어날 정도로 막대하여 

송 조정에서 동전의 역외유출을 여러 차례 금지하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 무역하던 국가에서는 송나라의 화폐들을 축척하는 행위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고분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된 여러 화폐들을 통해,

이미 중국(주로 송나라)의 화폐가 고려 내에서 널리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화폐를 주조하여 널리 통용되기를 원했지만,

이미 고려 전반에 퍼져 널리 사용된 중국 화폐를 이기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의 화폐발행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우리 자국의 화폐를 주조했고, 유통하시키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사진 속 엽전의 뒷면을 살펴보면

에러전으로 볼 수 있는 엽전모양의 착범이 있는 엽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려전의 앞면이 착범 등과 같은 에러전을 거의 없는데

유독 뒷면에 에러전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영달 선생님의 한국의 고전에는 다음과 같이 고려 에러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려전의 에러전은 실수로 빚어졌다기보다는 작의적인 것도 있다고 보여진다.

일정한 수량의 엽전을 만든 후 계량단위를 알리는 표식이었거나

주전 종사자들의 임금 지불 요구 표시 등 여러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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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려전을 수집하기에 딱 좋은 시기란 생각이 든다.

가격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화폐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고전 한두 점씩은 소장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소장하고 있는 화폐에 대한 스토리까지 알고 있다면

수집의 재미는 배가 될 것이다.


* 글의 일부는 겨레문화유산연구원 김진웅 연구원의 논문을 참조하여, 발췌 및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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