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통보 당이전이다.
당이전은 1679년(숙종 5)에 주조되었다.
최초의 상평통보는 초주단자전이라는 종류의 엽전이다.
뒷면 상단에 주전소만 표시한 엽전들로 매우 귀한 편이다.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상평통보가 1633년부터 발행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이전은 초주단자전과 구분하기 위해 하단에 '二'자를 새겨 구별하였다.
초주단자전보다는 액면 가치가 높은 당이전을 발행한 셈이다.
당이전은 초주단자전이 채우지 못한 조정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량을 늘이다가
과잉주조로 1697년에 주조가 중단되었다.
* 이후, 1731년에 빈민구제 조달과 화폐 부족 현상으로 인해
다시 주조를 하게 된다.
당이전 발행 당시,
초주단자전과 당이전은 함께 사용되었으나,
초주단자전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당이전은 초주단자전보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엽전을 주조하는데도
상당량의 원료가 투입되었을 것이다.
아마 기존 화폐의 일부를 녹여 주조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초주단자전이 귀한 것이 아닐까.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당이전이 주조되다가 원료의 부담이 커져서
당이전보다 작은 중형전을 발행하게 된다.
이후, 당일전, 당오전, 당백전 등이 주조되게 된다.
같은 상평통보라도 종류에 따라 주조시기가 크게는 2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당이전은 당일전의 2배의 가치를 지닌 화폐일까?
내 생각에는 당이전과 당일전은 주조한 시기가 다르다.
따라서 2배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물론 당이전이 당일전보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원료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이전은 1600년대 후반에서 1700년대 중반까지 주조되었고,
당일전은 1800년대 초반에 주조했다.
당이전이 계속 주조되었다면
당이전은 당일전의 2배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데,
역사적 기록상 두 엽전의 시대적 차이가 큰 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라도 엽전의 크기에서 부터 차이나는 두 엽전을
같은 액면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당이전 하나를 만들 원료면 당일전을 최소 2개 이상 주조할 수 있기 때문에.
무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할 듯 싶다.
사진 속 당이전은 '賑'(진휼청)에서 주조한 상평통보이다.
진휼청은 '조선시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서'이다.
즉 관청에서 상평통보를 주조한 셈이다.
이 엽전이 재미있는 이유는 착범전이기 때문이다.
뒷면에 적힌 한자와 월표가 이중으로 찍혀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기 마련,
그래서인지 상평통보에서 에러전이 간간히 발견된다.
당시 에러전이라는 개념자체가
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대 수집가들에게는
당시 엽전을 찍어내던 사람들의 고된 일도 떠올려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진휼청이나 호조, 해주관리영에서 주조한 당이전의 서체를 좋아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똑같은 상평통보겠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획의 길이라던지 글자의 크기 등이 차이가 난다.
이 또한 상평통보를 수집하며 느끼는 즐거움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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